일리一理-읽기/홀로 오롯이 공부 - 爲己之學
지혜라는 미래 / 김영민 <적은 생활, 작은 철학, 낮은 공부> 5
一理ROASTERS
2023. 5. 3. 14:44
지혜는 솟아나는 '영감'의 발현과 비슷한 어감입니다. '솟아난다'는 표현에서 지혜의 이미지가 드러납니다. 무엇보다 여러 영상 매체에서 드러난 지혜의 모습은 '위태'롭지만, 국면을 전환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특히 전쟁 영화에서 이런 지혜라는 이미지를 엿볼 수 있어요. 또한 현실과 타협하는 전략인 동시에, 불법과 합법 사이를 절묘하게 오가는 현대 드라마에서도 나타납니다. 무엇보다 성서에서 '솔로몬의 재판'에서 지혜의 모습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지혜는 무맥락적-무매개적 지식으로부터 '외출', 삶 속에 들어가는 비평적 실천과 함께 솟아나거나 쟁여진다.(그러나 결국 관건은 외출 그 자체가 아니라 외출한 이후에 다시 자신의 집으로 귀가할 수 있는가, 하는 데 있다.) 이미 지적했지만, 실천의 지평에서 동떨어진(=추상적인) 지식은 아직 '사람의 것'이 아니므로 감히 지혜는커녕 여태 비평의 자리조차 통과하지 못한 셈이다. ...그 모든 비평적 실천이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비평적 실천은 지혜를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보와 지식의 문턱이 한없이 낮아진 터에, 그리고 장삼이사의 전부가 제 나름대로 비평가의 안목을 자신하고 있는 때에 '비평'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는 그 무엇도 보장하지 못한다.(29)
직전 글(https://1-pattern.tistory.com/359)과 연결된 글입니다. 김영민 선생님은 비평이라는 과정,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자기-비평'으로 연결짓습니다. 드라마에서 클라이막스에서 나타나는 지혜의 형태가 아닌 '이미 개입한 자신을 자각'하며 그리고 '반 걸음의 실천' 곧 이어 '미래를 꿈꾸는 일'입니다. 생각 외로 소소한 인상ㅡ 그러나 처절하며 철저한 이미지와 혼재되어 있는ㅡ 지혜라는 가능성이었습니다.
지혜에 이르는 비평의 요령은 우선 그 비평이 타인을 향하기 전에 자기-비평이라는 점에 있다. 그 비평적 행위의 기원과 과정 전체에 이미 자기 자신의 개입이 엄연하다는 사실을 깨단하는 게 알짬이다. 이로부터 비평은 이론을 넘어설 수 있으며 또한 이로써 무책임한 비난으로 손쉽게 나아가지 않는다. 비평의 기원 속에 이미 자기 개입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그 비평의 실천 속에 되말아 넣은 것을 일러 '밟고-끌고'의 비평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상처로 인한 개입의 자리를 한 발로 밟고, 나머지 한 발로써 반걸음을 내딛는 실천이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자신의 상처와 자신이 만든 폐허를 잠시도 잊지 않은 채, 한 발도 아닌 반 발의 실천으로써 미래를 꿈꾸는 것이다.(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