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리一理-읽기/책 그리고 패턴

문제의식과 공명하기(직전에 썼던 글에 덧붙여)

by 一理ROASTERS 2021. 10. 13.

이 책 정신차려보니 절판입니다. 하지만 제 매장에서 한 권 남았습니다. 깨알광고, 뒷광고아닌 앞광고!

말로 설명되지는 않지만, 어떤 화두가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이 상태에서는 아직 설명하기에는 어떤 단어, 문장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 계기를 찾는 방법 중 하나가, 책에 있는 문장과 마주치는 일입니다. 아무래도 영상 매체에서는 디테일한 문제의식을 다루지 않고, 큼지막한 주제를 다루니까 그 매체 활용은 도움이 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단 큰 주제를 잡습니다.

어제 쓴 글 중에서 상담이 주제로 쓴 글이 있습니다.(https://1-pattern.tistory.com/75) 어제 썼던 글의 의식의 흐름을 살펴봅시다. 유명 정신과 의사, 상담가를 영상에서 목격하고, 댓글을 먼저 봅니다. 찬양 일색입니다. 근데 여기서 삐딱한(?) 반론이 떠오릅니다. 그 반론이란 상담이라는 방법론 하나로 누군가를 추앙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된 것이죠.이 답답함을 어디서 풀어야 할까요? 이러한 매체와 댓글에 영향을 받고, 궁리하다가 책을 뒤적이며 어떤 문장과 마주치며 답답함을 풀어주는 문장을 마주칩니다. 그 문장이 생각을 촉발시키고 문장을 잉태합니다. 그리고 그 반론 이면에는 제가 심리상담에 관심을 깊게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못됐던 그래서 어떤 질투심과 동경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짤막하게 소개합니다. 김영민 선생님의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2010)에서 상담이라는 키워드를 따서 정리한 겁니다.

 

상담은 궁극적으로 일방적 조언의 형식을 버리지 못한다. 그 결과, 마치 권력의 비용이 자기소외이듯이 상담자는 상담을 통해 정신의 반작용같은 소외를 겪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것은 만남도 아니며 사귐은 더욱 아니다. 한편 내담자는 비록 성공적인 상담을 통해 당면한 문제를 해결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존재가 문제의 일부로 객체화되었다는 사실을 후유증처럼 안고 간다. 조언을 통해 해결된 문제의 이면에는 실존의 자투리가 여전히 외롭고 부끄러운 채로 남아 있다.(김영민,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 23)

 

 

상담을 시작한 순간부터 내 존재 자체가 문제가 됩니다. 굉장히 부끄럽지요. 내가 병이라니... 그래서 용기를 내어 상담사-정신과 의사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그 상담자와 사귐은 없습니다. 내면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한 기대를 안고 찾아갔기에 그렇지요. 목적이 분명한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입니다. 병자와 치료자의 관계로 치환되니까요.

 

...학습과 상담은 기대만큼 쉽게 변별되지 않는다. ...내담자와 상담자의 관계에서는 학생과 선생 사이에서 보이는 일방적 긴장은 적고, 전이가 쉬워 동일시나 공명의 템포가 빠르다. 게다가 상담은 학습보다 자발적이고, 그 권위는 상식과 실용성에 의해서 보다 쉽게 점검되거나 취사되는 편이다. ...상담은 현실에 젖줄을 대고 말하며, 결국 그 현실 속으로 되돌려 보낼 전망을 붙들고 구체적으로 응대한다. 이 같은 현실주의적 실용성의 과정 속에서 마치 자신을 보고 웃고 있는 거울 속의 엄마처럼, 내담자는 상담자의 인정과 관심, 보살핌과 위로에 의탁해서 혼란스러운 인식에 도달하는데, 물론 이 인식과 인정의 혼동 속에서 길을 찾아내는 것은 결국 그 자신의 몫이다."
(김영민,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 24)

 

 

내담자는 상담자에게 무조건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환자니까, 의사를 믿어야지요. 상담은 그렇다고 '학습'은 아닙니다. 학습이 강제성이 있는 반면에, 상담은 내담자가 먼저 상담자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자발적이지요. 상담자의 목표는 가스라이팅이 아닙니다. 환자를 현실로 되돌려 보내야 하는 사명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환자는 의사에게 보살핌과 위로를 받아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보살핌과 위로를 극복하고 현실로 되돌아가야 하는 서글픈 운명이 기다리고 있지요.

상담과 분석은 우선 시간표의 제한을 받는다. ... 상담과 분석은 돈을 주고받는다는 점에서 자본제적 교환체계와 순접하고 있다. ...상담이 일방적으로 도움을 청하는 형식이다. ...
(김영민,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 25)

 

 

제가 잼민이 시절, 상담에 대한 거부감은 '시간'이 정해져 있는 만남이 아닌 '치료'라는 점입니다. 상담보다는 '교제'가 더 중요하지 않나라는 혼란스러운 문제의식을 안고 생각이 거기서 끝맺어버렸습니다. 제가 인용한 책에서는 '비평'과 '공부'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는 비교의 틀로 '상담'을 활용하긴 했습니다. 이 책은 상담을 비판하려 한 책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이 책에서 설명한 '상담'의 이미지가 제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과 맞물려서 하나의 글을 쓴 토대가 되었다는 점을 설명했습니다. 상담이 더더욱 필요한 시대가 됐습니다. 교제가 없어진 시대, 이혼과 바람(?)이 만연해진 시대, 그렇기에 현실의 치정극이 드라마를 뛰어넘어버린 시대, 상담의 필요성이 더더욱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결은 '법정'과 '경찰서'에서 합니다. 또한 상담사과 성직자의 역할이 어떻게 다른지도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더 공부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