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주된 삶의 방식, 무엇보다도 살아가는 삶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응하기'입니다. 이웃들 혹은 타인들과의 온/오프라인의 버성김 속에 놓여서 살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혼자 있는 동안에도, 유튜브에 속한 타자와 버성깁니다. '홀로' 역시, '타인'의 해설이 있어야, '홀로'가 비로소 '고독'으로 의미화합니다. 그렇기에 가장 익숙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보면, 타자에게 버성김을 뚫고 응하기는 어렵고도 어렵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응하기'는 그야말로 전부다. ...우주와 그 생명의 역사는 죄다 장구한 응하기의 과정이다. 응하기를 통해 그 실효를 얻는다는 것은, 곧 삶의 자리가 늘/이미 타자의 세속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愼獨마저도 (어떤) 타자(들)와의 대화다. 생각이 공부가 아니라거나, 혹은 기능적 선발로 되먹임되는 독서에 가치가 적다는 이치도, 정신의 진화와 그 德이 생활의 낱낱 속에서야 제 표현을 얻기 떄문이다. ...가령 이론이 자립할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은 오직 생활 속에서야 제 이름과 가치를 얻는다는 뜻이다.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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