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랩 일리에는 철학서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보문고 광화문점, 영풍문고 종각점만큼 많지는 않지만 공간의 허용치 안에서 책을 들여 놓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거창한 사상보다는 소소한 일상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보니, 읽기와 쓰기의 소소함과 웅장함 사이의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찾은 책입니다. 우치다 다쓰루의 <우치다 선생님이 읽는 법>입니다. 우치다 선생은 무도가이자, 개인연구소를 운영하는 재야 연구자입니다. 푸코, 레비스트로스, 롤랑 바르트의 해설서는 그의 대표작입니다. 대중철학자이지만, 그의 글은 힘이 있습니다.
제가 천착하는 주제도, 여전히 책이 무엇인가라는 주제입니다. 그에 대한 훌륭한 발언이 있어서 발췌해 보았습니다. 이 책을 맛깔나게 번역해낸 박동섭 님과, 기획하신 유유 출판사 모두에 감사할 뿐입니다. 이 책이 나오는 데는 단지 번역만 되어서는 되지 않지요. 이런 출판사-번역자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며 읽습니다.
언론에서는 '이 문제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이 문제로 이익을 얻는사람은 누구인가?'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던지고, 그때마다 '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전문가'가 등장해서 정답을 척척 가르쳐줍니다.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문제를 단순하게 정리해 주는 사람'이 인기를 얻습니다. 지식인도 그렇고 정치가도 그렇습니다. ...이런 식의 접근은 유해무익하며, 오히려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듭니다. 이러한 난관에 부딪쳤을 때 '복잡한 문제를 복잡한 채로 다루는 자세'를 취합니다. 복잡한 것을 무리해서 단순화하지 않는 것이 지성을 단련시키는 방식입니다. 이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입니다. 이런 작업에 필요한 것은 '날 선 지성'이 아니라 '강인한 지성'입니다. 결론이 나오지 않은 채 계속 공중에 매달려 있는 상태를 견디는 지적 인내력도 필요합니다.
-우치다 다쓰루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 한국어판 저자 서문 중.-
책을 읽는다는 것은 뉴스를 멀리하는 것을 뜻합니다. 한국적 상황에서의 적용입니다. 좋은 기사를 쓰는 기자님들을 구독하고 스크랩하는 것이 필요한 시대가 됐습니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처리하면 안됩니다. 다 발췌하지는 못했지만, 우치다 선생의 말마따나 가까운 매듭부터 풀어나갑시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말과 사물> 등등의 책이 출현하면서 세계는 그 책이 출현하기 전과는 다른 곳이 되었다. 그러한 책은 동시대 독자의 요구에 대응하지 않고, 동시대의 독서 소양을 넘어섰다. 그래서 그러한 책이 살아남으려면 그러한 책을 찾는 독자, 그러한 책을 읽을 수 있는 독자를 창조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책이란 이처럼 생성적인 것이다. ...책은 그것을 읽을 수 있는 독자와 그것을 읽으며 쾌락을 느끼는 독자를 창출해 내는 것이지 이미 존재하는 독자의 독해 능력과 욕망에 맞추어 쓰이는 것이 아니다.
-우치다 다쓰루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 485~486-
북랩 일리라는 공간에 책을 들여놓는 기준이 있습니다. 뭔 말인지 모르는 데, 와닿고 계속 곱씹게 되는 책입니다. 한 번으로 이해할 수 없고 여러 번 읽도록, 꽂아두면서 덮는 중에도 곰곰히 사유할 수 있도록 돕는 책들입니다. 그리고 시대를 풍미했던 '사상가'들의 책, '사상가'들의 궤적을 다룬 책입니다. 물론 대중 철학서도 들여 놓습니다.
사람들이 안주하고 있는 세계에 균열을 내면서 들어본 적도 없는 것이 들이닥친다. 그것은 공포와 불안의 경험이기도 하고 해방과 희열의 경험이기도 하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문학과 사상의 힘이다. ...현대의 잘 나가는 책의 대부분은 사상서라 부를 수 없다. 그러한 책들은 동시대의 누구라도 아는 말과 누구든 공유하고 있는 논리를 사용해서 누구에게나 공유되는 가치관과 미의식 위에 안주하여 쓰였기 때문이다. 미리 독자를 상정해서 이미 존재하는 수요를 '목표'로 쓰인 것은 엄밀하게 말해 사상서가 아니다. 글쓴이가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독자를 상정해서 그들의 우호적인 반응을 상상하며 글을 쓴다면 그가 쓰는 것은 사상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다. 사상과 이데올로기의 차이는 다름 아닌 거기에 존재한다. ...글을 쓰는 사람이 목표로 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아득히 먼 독자에게도 전해지는 글을 쓰는 것이다.
-우치다 다쓰루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 486~487-
현 시대의 베스트 셀러들은 시대를 잘 읽어낸 책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사상서는 아닙니다. 어떠한 파괴도 창조도 없기 때문이지요. 파괴와 창조의 체험을 하고 싶은 이들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사상서를 들여놓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좋은 책의 맛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그러한 체험을 나누고, 더 나은 체험이 되게끔 올곧게 '존재'하고 응대하는 일, 제가 하는 북랩 일리에서의 작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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