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우주>라는 책에서 '저장 매체와 재생 매체의 혁신으로 책은 없어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가 이 질문을 곰곰히 생각하면서, 떠오른 제 질문은 "저장 매체/재생 매체의 혁신이 정말 혁신적인가?"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책과 저장 매체 기술의 발전과 엮어서 생각하는 그런 영감을 얻습니다. 디스켓에서부터 하드디스크까지의 이야기, 2021년에는 SSD라는 형태로 저장 매체는 발전해왔습니다. 휴대용에 있어서는 디스켓, 작은 디스켓, 시디롬, 유에스비, 유에스비 3.0, 대용량 외장 하드(SSD 포함) 등등으로 이어집니다. 컴퓨터의 저장 매체는 이렇게까지 발전해왔습니다. 혁신적인 대용량(킬로바이트, 메가바이트, 기가바이트, 테라바이트)으로, 전송 속도도 혁신적으로 빨라졌지요. 더 혁신적인 것은 클라우드 시스템입니다. '연동'이 이제는 시대를 관통하는 '핵심 기술'이 된 시대입니다. 이런 기술이 애플을 혁신기업으로 거듭나게 했습니다.
주로 우리는 컴퓨터의 저장 매체를 통해, 음악, 인터넷 데이터 찌꺼기(쿠키라고 불립니다), 동영상, 작업용 프로그램, 게임 프로그램을 축적합니다. 컴퓨터가 수많은 매체를 대체하는 것 같은 착각을 주기도 합니다. 가령 영화는 다운받아서 보는 것도 컴퓨터가 있기에 가능해졌지요. 음악을 물질화한 음반 시장을 붕괴시킨 것도, 영화를 재생하는 DVD(지금은 블루레이 디스크)의 시장이 몰락해버린 것도 컴퓨터의 '추출 능력' 때문이기도 합니다. 특히 공유까지 하게 되면서, 쇠락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지요. 영화도 마찬가지, 그냥 다운 받아서 보면 됩니다. 불법이든 합법이든 스트리밍이든 선택지가 있습니다. 컴퓨터만 있으면 원론적으로 영화관까지 갈 필요 없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컴퓨터로 본다고 해도, 영화관에 비할 바 되지 않습니다. 기술이 훨씬 발전하더라도, 영화관에는 사람이 줄지 않습니다. 음악도 스트리밍이 이제는 표준이 됐습니다만, 안정적으로 음원 수익이 아티스트들에게 고르게 분배할 수 있는 합리성도, 그리고 고음질 스트리밍이라는 혁신도 생겨버렸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청력이 좋은 분들은 시디 음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트리밍 서비스도 이런 니즈에 맞추어 음원 자체가 아닌, 고품격의 음질(엠피쓰리따위로는 느낄 수 없는) 기술도 이제는 어느 정도의 프리미엄이 되기도 합니다. 프로듀서 디케이 채널의 음감 매체에 과감히 돈을 쓰는 소비자들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코로나가 되서 홈키트가 생긴다하더라도, 남이 내려준 커피, 바로 나온 커피만한 맛은 절대로 느낄 수 없듯, 컴퓨터가 많은 것을 할 수 있지만,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이 대담집에서도 이 논조를 분명히 하지요. "매체의 혁신이 과연 혁신적인가?"
그도 그럴 것이 시디롬이라는 혁신은 이제는 유물이 되었습니다. 시디롬 플레이어도 이제는 유물이 됐습니다. 디스켓들은 진즉에 폐기되어버렸지요. 무식한 외장형 하드는 버려지고, 피엠피라는 '비싼 매체'는 스마트폰으로 '일상으로' 대체됐지요. 스티븐 유가 따라올테면 따라와보라고 외쳤던 광속 모뎀, 와이파이로 대체됐습니다. 이 모든 것이 폐기 직전의 구닥다리라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속 가능한 저장 매체에 대한 환상이 드러납니다. 기술의 발전이 기존 기술을 용납하지 않고 폐기시켜버린다는 사실 즉, 지금 주목해야 할 하나의 역사적 사실은 백과사전 시디롬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책과 기술 간의 불협화음은 이 지점에서 시작되니까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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