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을 보게 됐습니다. 안본 지 10년 정도 된 거 같습니다. 유튜브가 두뇌를 쉬기에 완벽한 영상을 끊임없이 추천해주듯, 각잡고 날잡고 어떤 작품을 감상하는 역치가 약해진 시대입니다. 영화 혹은 드라마도 연속으로 보기 빡센데, 연극은 그것들보다 보는 것이 고된 작업입니다. 한없이 웃긴 작품도 있는 반면, 이번 작품은 철학적 메시지도 '절묘하게' 녹아 있기에 스토리를 잘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집중이 필요합니다. 사랑과 정의, 신과 인간의 두 축, 이 작품은 의자의 거리에 주목해야 합니다. 갈등 플롯이 드러나는 주요 암시 장치이니까요. 원작은 알베르 카뮈 <정의의 사람들>이라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 자체가 이반 칼리아예프라는 실존 인물을 토대로 쓰여진 소설입니다.
이 작품은 주인공 '칼리아예프'가 '혁명'을 위한 '거사(폭탄 테러)' 과정에 대한 실패와 성공,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테러 이후에 혁명가가 처형당하는 장면까지의 단순한 구성입니다만, 중점적으로 봐야할 것은 갈등관계입니다. 소박한 사람으로서, 혁명가로서의 갈등이 주된 축이지요. 인간인가, 혁명가인가를 갈등하는 주인공의 고뇌가 절실히 드러나는 연극입니다. 당 내에서 구성원과의 갈등, 그리고 연인과의 '사상 갈등', 그냥 살인한 죄수와 명분있는 살인을 한 자기 자신과의 갈등, 그리고 피해자와의 갈등, 자기 자신과의 갈등이 나타납니다.
칼리야에프는 초반에 명랑하게 등장합니다. 자신 만만하게 테러를 시도했지만 테러 현장에 어린 아이들의 눈을 마주치고 있어 한 번 실패합니다. 고뇌를 딛고(사실 딛지 못하고, 망가져가는 모습만 나옵니다) 이후에 성공하지요.(충격받고 떠는 모습의 연기가 각인되버립니다. 너무 강렬해서) 자신이 시인이었던 것을 흠이라 생각하고 부정하게 됩니다. 명랑했던 그가 급속도로 무너져가는 모습을 다룹니다. 처음에는 밝은 등장, 점점 어두워지고, 고뇌하는 자로서의 모습으로 변모해가지요. 약한 인간, 그러나 테러해야 한다는 사명이 있는 절박한 고뇌의 현장을 목격합니다. 결국 감정에 솔직했던 이. 영혼이 맑은(?) 이가 혁명이라는 기치 아래 고뇌하는 장면들의 연속입니다.
죄책감의 층위도 드러납니다. 아이들을 죽이려 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테러를 성공시키지 못했기에 팀원들에게 죄책감을 갖지요. 그 죄책감으로 인해, 오히려 더 미쳐갑니다. 혁명에, 테러에, 살인이라는 행위에 갈등은 하지만, '정의'를 이유로 더더욱 자기 자신을 몰아붙입니다. 이후 감옥에서, 살인과 대의와의 차이에 대한 고뇌, 용서에 대한 고뇌, 인민의 행복과 자기 자신의 행복에 대한 고뇌, 칼리아예프는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결국 그 고뇌를 가득 안은 채, 대공을 살해하는 데 성공합니다.
대공을 성공적으로 살해했습니다. 그로 인해, 칼리아예프는 감옥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죄수를 만납니다. 그 죄수는 살인자입니다. 살인과 혁명에서의 테러는 같은 것이라고 강조하며, 사형장에서 사형 과정을 돕는 대신 해주는 대신, 감형을 받습니다. 칼리아예프는 거기서 구조적 악을 목도하고 절규합니다. 그리고 간수의 회유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진짜 하이라이트가 나옵니다. 바로 대공의 아내, 대공비가 면회를 오게 됩니다.
대공비는 그를 '신앙'으로 '용서'합니다. 그녀의 사랑했던 남편을 잃고, 그의 시신조차 온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에게 사랑을 베풀겠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그에게 말합니다. "스스로를 사랑했으면 좋겠다"고.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사랑을 배웠으면 좋겠다"고요. 신을 알고, 신앙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칼리아예프는 그녀의 제안을 모두 거절합니다. 자신은 혁명에 순수하며, 고뇌하면서 그의 죽음은 당연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인민, 농민을 학대하고 억압시킨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자기 자신은 증오할 뿐이라고요. 하지만 대공비는 "그는 농민들을 좋아했어요"라는 말에 더욱 고뇌합니다. 굉장히 디테일한 연기가 압권입니다. 무너져가는 모습을 이렇게 몸짓으로, 손짓으로, 목소리 톤의 변화로, 눈빛으로 표현하는 배우, 그리고 대공비의 연기도 압권이었지요. 둘의 압권이 하모니를 이룹니다. 더욱 더 절망적으로 말이죠. 그녀는 신앙과 사랑을 말하며, 칼리아예프는 인민에 대한 사랑, 적에 대한 증오가 '정의'라고 말합니다. "사랑"과 "정의", "신"과 "인간"의 대립이 본격화되는 지점입니다. 자기용납과 자기부정, 증오와 정의 그리고 살인자와 혁명가, 인간적인 삶과 테러범이라는 과업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장면은 안타깝게까지 느껴집니다. 그리고 유언도 없이, 관찰자의 기억을 반추하며 극은 마무리됩니다.
혁명이 성공해도, 그 성공의 열매는 당시의 주역들이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후대에 기억되지요. 단지 '기억'으로 그칠 뿐입니다. 심지어 혁명동지들은 그 사실을 알고, 고뇌하다가 실패하다 죽든 성공하다 죽든 '죽음' 뿐입니다. 자기의 삶은 없습니다. 혁명가 이전의 삶도, 혁명을 위해 부정해야 합니다. 사랑도 '혁명'이라는 기치 아래라는 조건적이기까지합니다. 하지만 칼리아예프는 여주인공 '도라'를 존재 자체를 사랑하지만, 자기 자신이 무너질까봐 '인민'을 위해, '혁명'을 위해를 되뇌입니다. 현생은 엉망진창이지만, 미래를 위한 희생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것만이 자신의 혁명에 투신하게 만듭니다. 또한 그의 숭고한 죽음으로, 도라는 혁명의 투사가 됩니다.
이 연극은 성공의 당사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눙쳐져 있습니다. 혁명은 성공했지만, 테러의 대상이었떤 대공은 농민은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동시에 칼리아예프는 죄를 저지르게 하는 '구조'의 문제 전제주의를 혁명하기 위해서였다며 합리화합니다. 이렇듯 한 개인이 망가져가는 모습과 더불어. 한 개인에게 가혹했던, 동시에 동료를 선택할 것인가, 자기의 안전인가, 그 모든 것이 얽혀 절망하고 망가지는 결국에는 신념을 지킨 자로 남은 이의 사상은 전염됩니다. 또다른 투사의 탄생을 의미하지요.비극적으로 또 다른 혁명 투사를 만들어내며, 또 다른 비극의 연쇄, 고뇌의 연쇄를 만들어내며 극은 마무리됩니다. 혁명의 투사는 망가져갑니다. 성공해도, 또다른 개인을 망가뜨립니다. 극에서 말하는 숭고함은 굉장히 비참하게 다가오지요.
혁명이 성공하더라도, 혁명가들은 혁명의 기쁨을 맛보지 못합니다. 죄를 짓게 만드는 구조를 비판하지만, 결국에는 혁명 투사들에게 과업을 강요하고 엄청난 고뇌의 연쇄를 강화시키고 죽어버립니다. 그 죽음은 누군가의 죽음(아군이든 적군이든)을 일구겠지요. 무엇보다도, 죽음 이후의 세상을 '꿈'만 꾸다 죽어버립니다. 현생의 본인의 삶은 챙기지도 못한 채, 모르는 '인민'들의 행복을 위해서 죽었다고 믿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정의에 투사하는 일. 참 어렵습니다. 결국에는 어려움의 결을 확인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돌파해야겠지요. 동지를 왜 사랑하는가? 그가 예뻐서가 아닌, 사랑스러워서가 아닌 투사라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며, 그가 투사가 아니면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다채로운 질문들이 튀어나옵니다. 소소한 일상을 희생하고, 자기를 혐오해야만 얻는 '정의'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한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튀어나오고, 결국 사형을 담담히 받아들임으로서 마무리됩니다. 무엇보다 이야기도 이야기이지만 배우들의 연기에 특히 집중해야 합니다. 그걸 배우들이 어떻게 연출했나를 살펴보는 게 개꿀잼일 겁니다.
같이 읽을 책으로 디트리히 본회퍼의 <옥중서간>을 읽을 것을 추천합니다. 보다 더 인간적인 고뇌에 있어서, 본회퍼의 옥중서간만큼 완벽한 '유작'은 없을 겁니다. 이는 또한 배우의 연기에 몰입하는 감상도 있겠구, 독일 독재를 저항했던 역사의 흔적을 겹쳐 보는 것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대한민국의 비극적 역사의 막중함을 엿볼 수 있는 교육적(?) 효과도 있겠지요.
그리스도교 믿음에 대해서도 생각할만한 주제가 있었습니다. '대공비'와의 면회 부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요.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 적을 증오한다는 것, 누군가를 죽여 누군가의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는 믿음, '인민'을 위한 사랑, 누군가의 죽음으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거란는 '믿음', 그로 인한 자기 삶의 포기, 증오로 구현된 정의가 사랑으로 이어지는가, 전제주의에 대한 혁명가와 일반 대중의 인식의 괴리 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정의'에 대한 믿음, '인민'에 대한 사랑, 그를 위한 '증오'라는 수단, 끝없는 절망과 고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을 성취한다는 '믿음'은 스스로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이조차 괴롭게 만들고, 사랑하는 이를 죽음을 불사하는 혁명의 투사로 만들어버리는 굴레.
또한 시선을 넓힌다면, 당 구조가 과연 '애국'을 판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도, 충성심을 판단할 수 있는 척도가 있는지에 대해 엿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대장은 굉장히 수동적으로 나오거든요. 계속 누군가의 요청에 따라 휘둘리고 또 휘둘립니다. 어찌보면 안정적인 조직 운영이라 볼 수도 있겠지요. 종교적 측면도 볼 수 있습니다. 대공비의 신앙심으로 인해 용서가 가능했다는 점, 진정한 의미의 소통이 이뤄졌다는 점도 볼 수 있습니다. 서로의 어긋남 속에서 소통이 일어나지요. 서로의 의도대로 움직이지는 않았으나... 서로의 '고뇌'가 증폭되는 이어지는 소통 과정이 돋보였습니다.
무엇보다 당은 '교회'처럼 초월적인 신앙을 강요하는 경우를 왕왕 봅니다. 당 역시 '전제주의'와 같다고 볼수도 있겠습니다. 당원들 특히 행동대원들의 고뇌를 짓밟아버린다는 점에서 말이죠. 혁명이 필요없어진 시대에 살고있지만, 독립을 이루기 위한 '고뇌'의 크기를 엿볼 수 있었던 연극이었습니다. 특히 주인공의 연기가 미쳤습니다. 독립 투쟁이 단지 독립 투쟁이 아니라, 개인의 고뇌, 집단의 고뇌 혹은 폭력이 혼합된 사건이었지요. 이런 증오의 연쇄고리 속에서 신앙 즉, 종교는 '용서'를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용서받으면, 팀원들이 무사하지 못하지요. 이런 구조의 비참함도 엿볼 수 있습니다.
전제주의(현대어로는 독재겠지요)가 '악'으로 비춰지지는 않습니다. 그걸 악으로 생각하는 이는 '혁명당' 그리고 그 구성원들이거든요. 농민들도, 죄수도 전제주의를 문제삼지 않습니다. 심지어, 중간에 유약해서 폭탄 테러를 멈추게 된 팀원의 태도에서도 나타납니다. 선전부에 가서 시키는 일만 하는 것도 인민들에게 의미가 있다구요. 마치 <매드맥스>의 워보이와 같이요. 시키는 대로 하는 것과 애국, 인민을 사랑하는 일과 겹쳐버린 겁니다. 차이가 사라져버린 것이죠. 극에서 '당'은 실체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의 기치도 결국 '자유'인민에 대한 사랑일텐데, 그것은 환상으로 헛된 것으로 연출한 것처럼 보입니다. 결국 전제주의를 넘어 '자유'로 '스스로 선택'을 하는 단계에 이르러야 하는 데, 결국 '전제주의는 나빠요'에서 길을 잃고 헤맬 뿐입니다. 이것이 칼리아예프의 고뇌를 폭발시키는 뇌관이 되었지요. 그를 더욱 고독의 늪으로 끌고 가는 기폭제.
고전을 읽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요. 극을 보면서, 그 고뇌가 훨씬 더 이해되기 쉽더이다. 문학 작품을 통해서 10대가 어찌 고전의 맛을 알겠습니까? 지문으로 접하는 고뇌가 어찌 와닿겠습니까. 느끼기 보다는 정답을 맞춰야 대학에 가는데요. 벌써부터 장벽이 생깁니다. 고전이 중요하다 생각한다면, 이런 극들이 더욱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왜 문학을 어려워하는지에 대해서 그 근원을 알게 된 거 같습니다. 10대라는 짧은 삶에서 무엇을 익힐 수 있겠습니까? 아무 단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곱씹지 않는 상태에서 문학을 수험 문제로 만나는 것만큼 이 극에서 비판하는 '전제주의'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감상평이 섞여 있습니다. 여러 상념이 떠오르게 하는 극이었습니다. 꼭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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