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월드컵의 붉은 열풍이 전국을 휩쓸었을 때, 매스컴을 통한 자화자찬은 차마 극성이었다 ... 마치 축구공은 동시대 우리 사회의 物神인 듯했고, 텔레비전을 비롯한 매스컴은 그 예언자인 듯했다. ...당시 텔레비전 카메라들이 청소하는 관중들의 뒷모습을 찍어대면서 '시민의식' 운운한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시민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텔레비전 의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텔레비전 의식'이라는 생급스런 이름을 내놓는 이유는, 요컨대 거리 응원전을 포함한 월드컵 열풍 전체, ...모두가 텔레비전이라는 전포괄적 매체에 의해서, 매체를 통해서, 그리고 급기야 매체를 위하여 가능해진 사태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텔레비전의 시야는 그 자체로 '풍경'(가라타니 고진)으로서 생각 없는 시청자들이 시나브로 순치되어 가는 인식의 틀이다. ...그것은 단지 '환상적인 현실'이 아니라, 이미 현실이 되어 우리 현실을 움직이는 환상이었던 것이다. ...우리들이 텔레비전을 흡수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텔레비전은 우리를 흡수하고 있다.
실은, 우리가 텔레비전의 그 매체 형식에 동화되는 것은 곧 우리가 텔레비전을 흡수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텔레비전 매체의 일괄적인 수렴-확산 작용이 없이는 그같은 전 국민적 일체감이 가능할 수 없었으리라는 사실은 너무나 뻔하지 않은가? 그들이 '애국자'들이었다고?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시청자'들이었다. ...애국심이라는 어느 마음의 중심을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텔레비전이 확보하고 구성해주는 시선과 시야를 좇아 움직인다. 이제 텔레비전이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이다. (88-90)
제가 늘 의구심을 품고 있는 화두 중 하나는, 스마트폰입니다. 그리고 내가 스마트폰을 활용하는 것이 아닌, 스마트폰이 나를 길들이는 그런 위화감이 들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거든요. 김영민 선생님의 이 글에서 나온 텔레비전은 스마트폰으라 바꾸셔도 무방합니다. 아니 더 나아가 유*브나, SNS로, 인터넷 신문 기사로 등치시켜도 딱히 이상이 없습니다.
우리는 유*브 세계에서 시청자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일(뒷광고 고발, 댓글, 싫어요로 알고리즘 조절)을 할 수 있다지만, 거대한 알고리즘에 잠식당하고 있다고 봅니다. 저 역시도 틈새 시간 때, 유튜브를 보고 있고, 더 재밌는 게 없나 계속 탐색하고 있으니까요. 그마저도 영상에 머물러 집중하지도 않고, 빨리 재생을 하다가 지치면 결국 도달하는 곳, '먹방'입니다. 중간 중간 뉴스를 본다지만, 댓글의 여론에 휘둘립니다. 또한 뉴스 매체들 또한, 유튜버화됩니다. 이제는 자극적이고, 잔인한 장면들이 모자이크를 거쳤다지만, 티비에서 다루는 그것보다 훨씬 아프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밈'이 뜨면, 수많은 유튜버들이 이에 편승하고, 우리는 유튜버들의 편승에 휩쓸려, 누군가의 배를 불려줍니다. 또한 우리는 밥을 먹으러 갈 때도, 블로그와 리뷰, 댓글에 휩쓸립니다. 더 나은 선택이라는 이유로요. 결국 영화와 동화 사이 속에서 우리는 계속 휩쓸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씁쓸한 자연스러움이라 받아들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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