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시험 점수를 높이기 위한 '목적'이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오해를 한 적이 있었다. 내 삶은 그대로이지만, 내 지위를 올리는 것에만 급급했던 거 같다. 말투, 쓰는 문장, 행동거지 등등은 신경쓰지도 않아도 되는 부분이라는 착각을 갖기도 했었다. 인터넷에 널부러져 있는 강의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차후 공부를 하면 될 터였다.
결국에는 돈을 벌기 위한 '공부'가 공부라고 규정된 탓일까, 심리적 장벽이 높게, 그리고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대학교에서 어떤 과목을 이수하고, 학점을 받더라도, 과연 그게 공부의 '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단지 수강하고, 하나의 '분야'를 알게된 것까지가 '강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한다. 결국에는 내 스스로, 삶에서 공부의 흔적을 쌓아나가는 그런 공부가 있긴 한걸까? 김영민 선생님의 책을 차분히 읽게 된다.
공부의 밑절미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가장 효과적이며, 또 그래야만 공부의 전일성을, 그 不二의 통전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因이 이미 내 것이 아니라면, 생활의 양식을 재구성해서 그 성취에 유익한 緣을 몸에 앉혀야 하는 게지요. ...그 생활은 적어야 합니다. ...분방하고 번란해서는 아무 결실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집중과 지속성, 혹은 精과 熟이 없이는 졸부이거나 소비자고 건달이거나 건공잡이에 불과하지요. 적고, 일매지게 갈래를 잡은 생활 속에서는 비근한 일상의 자리들에 얹혀 있는 갖은 갈피를 분별할 수 있고, 거기에 웅성대는 이치들에 새삼스레 주목하게 되며, 이윽고 철학의 눈을 갖게 됩니다. 이 철학은 작은, 제 이름을 가진 사유의 방식이며, 이로써 이른바 하학상달(下學上達)의 전망이 생기지요.(10)
차분함과, 익어감의 공부라니, 그리고 내 생활의 틀을 재구성하는 공부라니. 기존에 갖고 있는 '시험'이라는 목적으로 하는 공부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이토록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이라니.
담박한 생활과 비근한 사유의 집심과 근기는 오직 낮은 중심에서 생깁니다 ... 낮아야 비로소 보이고, 낮아야만 멀리 갈 수가 있습니다. 인문학이나 수행의 공부길은 인간됨을 통해 개입의 실천과 뗄 수 없이 엮여 있기 때문입니다. ...생활을 줄여서 허영과 쏠림에서 벗어나고, 그제서야 드러나는 미립과 기미와 이치들에 주목해보세요. ...그래서 낮아지고 낮아지는 게 요령이지요. 그래야만 높아지고 깊어질 수 있습니다.(11)
소소하고, 사소한 일상 속, 낮게 가라앉은 지금 이 순간! 하나씩 해나가보자. 허영과 쏠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 또한 비로소 보고, 멀리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공부를 해야하는 이유겠지. '낮음 속에서 드러나는 높이와 깊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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