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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一理-읽기/일상 그리고 패턴

키보드로 처락하기(철학하기라고 붙이기에는 부끄러워서...)

by 一理ROASTERS 2021. 6. 10.

 

키보드 구입은 처음이다. 하지만 또 지름에 익숙해지지 않을까하는 불안감, 게임도 그렇고 키보드 구입도 그렇고 스피커 구입도 그렇고 자아가 팽창한 내 자신의 불안감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에니어그램 5유형의 강박이라고 봐도 될지도....

키보드를 샀다. 그전에는 텐키리스 받은 것을 썼는데, 숫자치는 데 불편했다. 하지만 수개월후 익숙해지고 나서 괜찮았다. 키를 누르는 키감도 미끄러지듯 가벼웠고 경쾌했다. 처음 써본 기계식 키보드였다. 몇개의 자판이 안눌려서 글의 리듬감이 막힐 무렵, 그런데 풀키보드가 그리워졌다. 새로운 키보드, 기계식 키보드를 열심히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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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 리뷰는 블로그보다는 역시, 유튜브다. 책방이고, 한때는 유튜브와 상생할 수 없겠구나하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생각했다. 결국 책방을 운영한다지만 지금 이 시대의 최소한의 전자기계와 기본 성능을 갖추지 않으면 사업을 벌리지도 못한다. 수많은 유튜브 리뷰어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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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나는 글을 벼려야 하기 때문이라는 합당한(?) 이유마저 붙이면서 내 자신을 강하게 동기부여(자기합리화)하며, 10만원대는 과하고 가성비와 갓성비 사이에서 키보드를 선택했다. 기계식 키보드 초짜인 내게 아무리 좋은 키보드를 써도 좋게 느끼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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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알아볼 때, 할인률이 높은 레이저 키보드를 보게 됐다. 189,000원짜리를 10만원대 초반에 판다. 혹할 뻔했다. 지금 쓰는 콕스 ck108키보드(광고아닙니다. 언젠가는 들어왔으면 좋겠다.)를 주문 취소할 뻔했다. 겨우 참았다. 이 기계 적어도 익숙해지는 시간, 내 두뇌로부터 나오는 아이디어와 몸의 각인과 손가락의 경쾌함과 더불어 함께 하는 시간이 절실했다. 아직은 무언가를 평가하기에는 애매하고, 키보드를 처음 써봤기에 조금은 더 써봐야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봐도, 이 정도면은 가격만큼의 값은 한다고 했다. 이 키보드가 언젠가는 불편할 날이 올 때 바꾸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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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도 좋고, 키를 누르는 힘도 그리 많이 들어가지 않는다. 지금 위에 언급된 키보드로 작업하고 있다. 10년전이었다면, 꿈도 못 꿀 가격이며, 키보드야 '자판만 잘 눌리면 돼지' 이런 생각을 했을텐데. 리듬감이라는 것을 무시못하겠더라. 기계식 청축 키보드처럼 소리가 너무 커도 문제가 되긴 하지만, 적어도 키를 누를 때의 소리는 내 마음의 상태와 조응하기도 한다. 어떠한 리듬감, 내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일종의 지표가 되는 것이다. 재밌었다. 이 글의 첫 문단에 다룬 그 키보드의 감각에 물들어버린 영향도 크겠지만, 한 문장 한 문장 길어올릴 때마다, 혹은 내 생각을 갈길 때마다 이 키보드에 내 감정과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 나온다. 키보드의 찰진 터치음은 음악과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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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2~30년전이야 흔하고 길에 널린 게 연필이었고 저렴했지만 지금은 커스텀되고 개성을 갖게 된 연필처럼(예전에 연필만 파는 샵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키보드도 몇천원대로 떨어졌다 하더라도 이제는 기계식 키보드에 미쳐가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처럼, 고급진 만년필 가격이 무지막지해지는 것처럼, 어렴풋이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됐다. 글을 다루는 직업을 가지고 있을 때에도 기존 키보드(다X소 거...)는 보는 것만으로 무기력해졌고, 딱히 애정도 생기지 않았다. 안그래도 글을 다루기 짜증났는데, 키보드를 보니 더 짜증나는 그런 것이었다. 그 키보드에 직업적 빡침이 내장되어 있었나 보다. 그런데 그런 일을 멈추고 나서야, 직업 속에서의 나 자신을, 직업에서 멀어진 내 자신을 비교하면서 둘의 사이를 좁히거나 둘의 사이를 단절시키면서 게걸스럽게 내 자신의 본성을 찾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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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키보드가 일종의 나의 다른 얼굴이 된듯하다. 부산한 사진을 올리지 않더라도, 그럴듯한 도화지와 글의 장소만 있다면야 이 키보드는 내 자신을 옮길 수 있는 훌륭한 번역도구이다. 그 직전에 썼던 구린 키보드에서 이 키보드로 옮긴 것은 일종의 내 삶의 환경이 변했음을 뜻한다. 키보드도 이것만 혹은 키보드 이외의 것을 쓰면서도, 부산하고 산만하게 다른 매체를 끌어들이며 내 자신을 이끌어내려 한다. 키보드 하나로 혹은 21인치 작은 모니터 듀얼 연결로 내 본성이든, 야성이든, 게으름이든, 죄성이든 이렇게 벼려가는 행동을 하면서 나의 일리를 찾아나가는 여정이리라 믿는다. 기계를 통해, 인터넷의 글쓰기를 통해 내 자신을 발견한다는 게 쵸큼 웃기긴 하지만 이제 그런 시대가 됐음을 굳이 부인하지는 않겠다. ㅋㅋㅋㅋ 인간은 어차피 이미 사이보그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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