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보면 2011~2017년 사이, 짧게 보면 2014~2016년 사이에 인문학 '광풍'이 불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그런 부분에 대해, 조명하고 취재하고 싶다는 생각에 학술 쪽 기자에 잠시 몸을 담았던 적이 있다. 저자와의 만남 혹은 강연 위주로 구성하는 책방들도 폭발적으로 늘었던 시기도 2017~2018년 잠시간 그랬었다. 그런 분위기가 오래갈 것이라 판단해, 스스로도 매장을 만들게 됐지만, 찾는 이들도 없어졌으며 그런 책방들은 이제 남아 있지 않다.
인문학이 중요하고, 관련 강의를 하는 강연자들도 많아졌지만, 돌아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느 순간부터 '새 인재 발굴'이 멈추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불편한 사실을 목도한 게 있다. 결국 출중한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인맥이 있는사람이 나온다는 사실을.
기자로서 볼 때의 출중함과, 일반인(?)이 봤을 때의 출중함이 다르게 다가오는 거 같다. 출중한 이들은 결국 안착하지 못하더라. 그리고 반대급부라고 해야 할까, 인문학이 잠깐 흥했어도 결국에는 유튜브에 떠오르는 알고리듬은 '부자되는 법'이었다. 부자되는 방법으로 부자된 이를 칭송하고, 숭배한다. 역설적으로 의미와 가치를 중시하는 인문학은 결국 '맘몬 숭배'로 끝이 나버렸다.
'인문학이 인간을 구제한다'는 식의 논변 자체에도 적지 않은 문제가 있겠다. ...그 무엇을 살리는 것이 인문학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한때 남자들이 떼 지어 인문학을 소비했고 또 적시에 다른 곳으로 떠나갔듯이, 남자들이 떠난 자리를 역시 떼 지어 채우고 있는 여자들도 그것을 얼마간 소비하다가 필경 또 다른 곳으로 떠나갈 것이라는 에측이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인문학은 정신문화적 자존심의 얼굴마담, 혹은 어떤 정화된 욕망의 매개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결국 그 무엇을 살리는 주체는 사람이며, 그 사람들의 자신의 사적 욕망과 허세를 위해 인문학을 겨끔내기로 이용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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